마산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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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山, Masan

삼한.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삼국사기“에 마산, 창원, 진동 등 해안포구를 중심으로 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 지명이 나오는데, 포상팔국의 중심세력은 마산만에 자리잡은 ”골포국(骨浦國)“이었다고 한다. 창원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팀이 1990년 12월에 발굴한 마산 현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유적지로부터 AD3세기대까지의 패총, 가야 초기의 주거지와 고분, 그리고 가야 후기의 석실분이 조사되어 유적의 시기적인 폭이 크고 복잡하다. 고분은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파악되며, 동 시대의 김해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와 접경, 완충지대에 해당되어서 가야사회의 지역적 역동성을 고려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서 “합포현은 본래 골포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었다”고 서술된 바 신라 35대 경덕왕이 모든 지명을 한자로 개명하면서 마산지방이었던 골포를 합포로 개명하여 고려, 조선초까지 합포로 불리웠다. 마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때 현재 수출자유지역 후문에 선박의 정착장인 굴강이 있었는데 여기에 세공미를 수송하는 조창을 두면서 마산창이라 하였고 조창이 어시장 쪽으로 이동하여서도 여전히 마산이란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합포란 이름 대신 마산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다.

고려시대

고려 창건 후 성종 2년에 이르러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마산은 진주목에 속하게 된다.

합포현은 뒤에 회원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마산권은 창원도호부를 중심으로 칠원. 진해, 웅천현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태종때 의창현과 회원현을 합병하여 창원부로 삼고 판관을 파견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병영을 설치하였다. 창원은 의창의 창과 회원이 원을 따서 창원이라 하였다. 그후 태종 15년에 창원부는 창원도호부로 개칭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4년에 창원은 다시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마산포 개항

마산포는 고려 초기에 이미 전국 12조창 중 하나인 석두창이 설치되어 세공미의 운송을 담당하였고, 조선 영조 때는 경상도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진주 가산창, 밀양의 삼량창과 함께 창원의 마산창이 설치되어 마산포는 항포구로서의 역할을 활발히 수행하여 왔다. 18세기 중반 이후 조창과 더불어 발달한 마산포는 중서부 경남의 곡물집산지이었고, 미곡, 면포 및 명태, 모시가 교환되는 동해안과 서해안을 잇는 원격지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마산포에는 남해와 서해에서 잡힌 선어, 염어가 들어와서 대구 등지 내륙으로 출하되고. 함경도 명태잡이 배가 빈번히 드나드는 午山선창, 漁선창, 百日稅선창, 西城선창 등 4개의 선창을 가진 유수한 어항으로 발전하였다.

마산포는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가 개항된 것에 이어서 1899년 광무 3년 5월 1일에 군산항, 성진항과 함께 개항되었다. 마산포가 개항되자 마산포 조계장정에 따라 각국 영사관의 부지면적을 제한하게 되었고 일본, 러시아, 영국영사관 부지가 결정되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영사관 건물을 건립하여 운용하였다.

일제하의 마산과 항일운동

조선총독부의 지방행정체계의 개편으로 마산의 행정구역도 개편되기에 이른다. 1914년 3월1일 총독부에 의해 부군제가 실시되자 마산포는 마산부로 개칭되었다. 1920년대 이후부터 1930년대 초반 사이에 마산의 거의 모든 경제권은 일본인들 손에 장악되어 갔다. 마산에서의 3·1 만세운동은 마산의거·진동면 고현시장의거 · 삼진의거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3·1 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식민통치의 방향을 무단통치에서 문치주의를 표방한 고도의 기만정책으로 바꾸었다.

8·15 민족해방과 한국전쟁

마산의 부두가에는 일본등지에서 돌아온 동포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이로 인해 마산의 인구는 급속히 증가되었다. 마산은 1946년 6월 29일 세관·해사국·검역소 등 임해관계기관들이 설치됨으로써 새로이 국제무역항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원래 마산항은 구한말 1899년 5월1일 마산포 개항으로 출발하였으나 한일합병 이후 1911년1월1일자로 폐쇄되었다가 이때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6.25 전쟁 발발 불과 한달만에 진주지구까지 침투한 북한군 제6사단은 아군의 병참기지인 마산을 공략해왔지만 국군과 연합군의 희생과 시민의 애국정신이 헛되지 않아 끝내 우리의 향토 마산에는 적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전쟁 중 병참기지화된 마산은 밀려드는 피난민으로 1946년 8만명이던 인구가 13만명을 넘게되어 치안이 무질서하게 되고 또한 망국적인 밀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경제적 혼란을 초래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크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마산을 택해 모여와 전통적인 문학의 고장·예술의 도시인 마산을 이룩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3.15마산 항쟁과 부마항쟁

3월 15일 선거에서 이승만대통령은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3월15일 선거 시작 전부터 자유당 측 선거운동원들은 공개투표를 집요하게 강요하였고,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3·15마산항쟁을 깃점으로 4월 혁명을 쟁취하였고, 다시 부마항쟁을 통해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한 마산시민의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고귀한 투쟁은 한국근대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쾌거가 아닐 수 없으며 이로써 우리 고장 마산은 민주주의의 성지로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공업도시로
발전

종래 술의 도시 마산 그리고 수산물집산지로서의 상업도시 마산은 1965년 현 양덕동(반네들) 일대에 국대 최대규모의 현대식 합성섬유제조업체인 한일합성섬유공업이 건설된 것을 시발로 하여 공업도시화의 신호가 울렸다. 1970년 1월 수출자유지역설치법에 따라 봉암동 공유수면 매립으로 조성된 대지 위에 국내 최초 임해공단인 수출자유지역이 설치되었고, 이로써 마산은 남해안의 상공업 중심도시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1977년12월16일에 마산역이 건설되고 연이어 시외버스터미널이 서성동에서 합성동으로 이전해오면서 종전의 구마산. 신마산. 북마산으로 이외에 동마산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73년 11월15일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고, 1977년 12월12일에는 구마고속도로가 개통됨으로써 마산의 발전이 더욱더 가속화되었으며, 1961년에 15만명에 지나지 않았던 마산인구는 1971년에 19만5천명, 1976년에 33만8천명, 1980년에는 45만명에 이르렀다. 1995년 1월1일부로 마산시에 창원군 내서면, 귀산면, 진동면, 진전면, 진북면의 5개면을 흡수 통합하여 지역적 확대와 더불어 시세 발전의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

한편 창원시는 1973년부터 창원군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일대에 창원기계공업단지를 건설하게 되면서 기계업종 중심의 1백개 이상의 기업이 들어서고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배후도시로서 마산시를 더욱 발전하는 촉매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통합창원시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